미하엘 슈마허 (Michael Schumacher)
2006년 말에 은퇴했던 미하엘 슈마허는 2010년F1에 복귀한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F1을 떠났다가 54년 만에 돌아온 새로운 메르세데스 팀과 함께한다. 로스 브런과 다시 함께 하는 그의 복귀는 트랙 위에서 자신만만한 이들을 제외한 많은 드라이버들에게 위협이 될지는 몰라도 F1 펜들에게는 굉장한 뉴스거리이다.
역대 최고의 드라이버가 누구냐의 논쟁 속에 미하엘 슈마허는 항상 언급되어질 것이다. 만약 통계적으로 결정한다면 유일한 우승자는 당연히 슈마허가 될 것. 그는 가장 많은 챔피언십 우승, 가장 많은 레이스 우승, 가장 빠른 속도 기록, 가장 많은 폴 포지션, 가장 많은 득점과 싱글 시즌 동안 가장 많은 레이스에서 우승을 하며 F1기록을 다시 썼다. 그가 트랙을 지배했던 시대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낸 2002년 시즌, 모든 레이스에서 1위, 2위나 3위를 차지한 슈마허의 기록은 그 누구도 깨지 못했다. 어떤 F1 마니아들은 짐 클락이나 후안 마누엘 판지오 같은 초기 자이언트를 최고의 드라이버로 내세우고 또 어떤 이들은 60년대 후기에 왕성했던 재키 스튜어트, 또 어떤 이는 80년대 타이탄인 알랭 프로스트나 아일턴 세나를 내세울 것이다. 디베이트는 지속되겠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미하엘은 당대 최고의 드라이버이었고 2010년 현재 최고의 드라이버로 구별되는 알론소와의 베틀은 스포팅의 굉장한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슈마허의 우승을 향한 완전한 헌신은 대립된 의견들을 가져왔다. 어떤 이들은 그가 의문점이 많은 전략을 사용한다 믿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그가 경주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주제 넘는 행동을 했다고 믿는다. 가장 논란이 많았던 두 개의 사건 (94년 데몬 힐과 97년 쟈크 빌뇌브)이 마지막 레이스에서 일어났고 그 여파는 챔피언십의 결과를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력 했다. 한편, FIA가 액션을 취할 때 즈음 그는 상황해석을 잘못하는 것에 의존하기보다 흔쾌히 결정에 따라줬다.
슈마허는 트랙 밖에서 자기 얘기를 잘 안하며 미디어의 눈을 최대한 피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인도주위적인 차원의 재정 후원에 있어 굉장히 너그러운 사람이다. 소문에 의하면 2006년 은퇴 직후, 4년 동안 자선구호단체에 5000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한다.
국적/생년월일 | 독일 , 1969.01.03 |
소속 팀 | 메르세데스 |
차 번호 | 3 |
전 소속 팀 | 페라리(06, 05, 04, 03, 02, 01, 00, 99, 98, 97, 96) |
베네통(95, 94, 93, 92, 91) | |
조던(91, [1 레이스]) | |
챔피언십 | 7 (2004, 2003, 2002, 2001, 2000, 1995, 1994) |
레이스 | 250 (249 스타트) |
우승 | 91 |
포디엄 | 154 |
폴 포지션 | 68 |
최고 속도 랩 | 76 |
첫 레이스 | 1991 벨기에 그랑프리 |
첫 우승 | 1992 벨기에 그랑프리 |
마지막 우승 |
2006 중국 그랑프리 |
평범하고 열심히 일하는 부모님을 둔 슈마허는 서독에서 태어났다. 4살 때 그의 아버지로부터 카팅에 대해 알게 되었고 6살 때 첫 클럽 챔피언십을 우승했으며 14살 때 독일 주니어 카트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그리고 18살 때 독일과 유럽 시니어 챔피언 타이틀을 목에 걸었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슈마허는 많은 포뮬러 일인승 레이스에 참가했다. 그 중 포뮬러 쿄닉과 독일 포뮬러 3 시리즈에서 우승을 했다. 1991년 F1으로 커리어를 옮긴 슈마허의 첫 레이스는 벨기에 GP, 조던에서 교체선수로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예선에서 조던의 드라이버인 안드레아 드 세자레스를 앞질러 7위로 예선을 통과하게 되었지만 기계적 결함으로 첫 랩에서 리타이어 할 수 밖에 없었다. 남은 시즌 동안 슈마허를 팀에 남겨놓으려는 에디 조던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즌을 베네톤과 함께 마무리 했고 이태리 GP에서 그의 팀 메이트이자 3번의 세계 챔피언이었던 넬슨 피켓을 앞질러 5위를 함으로 첫 포인트를 따내었다. 슈마허는 92년도 멕시코 GP에서 3위를 하여 베네톤에서의 첫 포디엄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첫 승리는 그 유명한 스파 프랑코샹 서킷에서 거두었다. 또한 슈마허는 F1에서의 첫 풀 시즌을 포인트 스텐딩 3위로 마무리했고 1993년도 시즌에는 포르투갈에서의 우승을 포함한 9번의 포디엄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7번의 리타이어먼트는 4위라는 챔피언십 결과를 안겨주었다.
1994년도 시즌은 3번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 주인이었던 아일턴 세나와 심텍의 드라이버 롤란드 라첸버거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같은 사고는 아니었지만 둘 다 산 마리노 그랑프리 중에 사망했다. 아일턴 세나는 당시 F1세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드라이버였고 그의 죽음은 스포츠 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첫 7개의 레이스 중 6개를 우승한 슈마허의 94년도 시즌 스타트는 그야말로 굉장했다. FIA는 멕라렌, 페라리와 베네톤이 머신에 혹시 전자 보조기구를 사용했는지에 대해 조사했다. 멕라렌과 베네톤의 꾸물거림은 FIA에게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졌고 양 팀 다 10만 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그리고 베네톤이 규율에 어긋나는 소프트웨어, 즉 드라이버들이 스타트할 때 어드벤티지를 주는 '발사 관제' 소프트웨어를 탑재하고 있다고 판결되었다.
영국 GP에서 슈마허는 페널티를 무시해 내려진 흑색 기를 또 무시하는 바람에 경주에서 탈락되었다. 베네톤은 이러한 사건의 이유를 경기 담당자들과 팀의 커뮤니케이션 에러라고 단정지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두 번의 레이스 참가를 금지 당했다. 벨기에 GP에서 슈마허는 스키드 블록에 너무 많은 장신구가 달려있다는 판정 때문에 다시 탈락되었고 포인트 리드에 대한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1994년 시즌의 마지막 레이스인 호주 그랑프리에서 슈마허의 커리어상 가장 논쟁이 많이 될 만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슈마허의 우승을 향한 열정이 어떤 때에는 도가 너무 지나쳐 스포츠맨답지 못한 행동을 초래 한다고 표현했다. 레이스 초반, 슈마허는 영국 드라이버 데몬 힐(윌리엄스)보다 1점 앞서 있는 상태였다. 36번째 랩에서 슈마허는 선두를, 그리고 그 뒤로 힐이 2위를 지키고 있었다. 벽을 살짝 스친 슈마허는 바로 옆에서 추월을 시도하던 데몬 힐이 지나고 있는 길목으로 머신을 몰고 가는 듯하다가 힐과 충돌을 일으켰고 결국 힐은 레이스에서 탈락되었다. 아무런 득점 없이 슈마허는 그의 첫 드라이버 세계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하였다. 이 사건은 분명 영국 펜들이나 신문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지만 레이스 담당자를 포함한 많은 독립적인 목소리들은 이 사건은 단지 레이싱 사고였다고 판단하였다.
1995년 시즌, 데몬 힐을 33점 차이로 우승을 차지한 슈마허는 그 해, 힐과 총 두 번의 충돌 사고(영국과 이태리 GP)가 있었지만 아홉 번의 우승과 11번의 포디엄을 기록한 시즌 성적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한편, 미하엘의 상냥한 팀 메이트였던 브릿 쟈니 허버트가 베네톤의 첫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을 획득 하는 데에 공을 세웠고 미하엘은 세계 챔피언십을 최연소의 나이로 두 번 우승하였다. (2006년, 페르난도 알론소가 기록을 깼다).
1996년, 슈마허가 페라리로 옮기기로 한 결정이 나중에 깨닫고 보면 위험하지 않았다 할 수 있겠지만 야심 찬 드라이버가 당시 조디 쉑터(1979)이후 그 어떤 드라이버도 챔피언십을 우승하지 못했고 1983년 이후 단 한번의 컨스트럭터즈 챔피언을 우승치 못한 페라리를 선택하는 것은 여간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페라리의 머신을 '트럭', '돼지', 그리고 '사고치기 일보직전'이라 표현한 알랭 프로스트를 포함한 많은 드라이버들은 페라리를 빈약한 농담거리로 여겼다.
슈마허의 존재와 팀 총감독인 쟝 토드의 지도의 손길은 팀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모든 랩을 3위 안으로 마무리한 미하엘은 페라리에게 첫 우승을 가져다 주었고 벨기에와 티포지 앞에 위치한 몬차에서도 우승을 하였다.
1997년, 미하엘과 베네톤에서 함께 있었던 로스 브런과 로리 번이 페라리에 합류하여 쟝 토드와 함께 페라리를 F1 역사상 최고로 성공적인 팀으로 변화시켰다. 하지만 1997년이 대약진의 해는 아니었고 미하엘의 평판이 도전 받는 해였다. 윌리엄스의 쟈크가 시즌 초반에 리드를 하고 있었지만 시즌 마지막 레이스가 열린 헤레스에서 슈마허가 획득한 5 레이스의 승리는 그가 챔피언십을 1점 차로 이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슈마허가 빌뇌브를 리드하고 있었고 챔피언십을 가져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그의 머신에서 냉각수가 새어 성능을 떨어뜨렸고 레이스를 완주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빌뇌브가 미하엘을 추월하려고 했을 때 그는 윌리엄스에게 머리를 돌려 페라리의 오른쪽 프론트 휠로 빌뇌브 머신의 왼쪽 사이드 포드를 박았다. 빌뇌브가 3위로 레이스를 마무리 했을 때 슈마허는 레이스에서 리타이어했고 빌뇌브는 4점을 챙겨 세계 챔피언십 타이틀을 가져갔다. 그 해 시즌의 결과로 인해 슈마허는 FIA에서 탈락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FIA는 "그의 동작은 본능적 행동이었고 악의나 고의로 한 것이 아니나. 단지 심각한 에러사항뿐이었다". 원래 세계 챔피언이었던 드라이버가 탈락 되는 것은 슈마허의 케이스밖에 없다. 그는 FIA의 결정을 신사답게 받아드렸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미카 하키넨(멕라렌)은 굉장히 빠르고, 굉장히 침착하고, 굉장히 용감하며 굉장히 잘하는 전형적인 핀란드의 레이스 드라이버다. 1998년과 1999년은 그의 해였다. 1998년 시즌까지 2개의 레이스를 남겨놓고 그는 슈마허와 같은 점수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2개 레이스에서 우승을 하면서 그의 첫 드라이버 챔피언십 타이틀을 확보했다. 레이스 후 트랙위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은 상당히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벨기에 GP에서 슈마허는 40초의 차이로 레이스를 리드하고 있었지만 호우로 인해 물보라가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 드라이버 데이비드 쿨사드(멕라렌)를 추월하려고 다가오는 슈마허를 감지한 쿨사드는 자신의 속도를 약간 낮춰 슈마허가 지나가도록 양보했다. 하지만 슈마허는 이것을 보지 못했고 결국에는 충돌하고 말았다. 두 대의 머신이 피트로 돌아갔을 때 슈마허는 놀랜 쿨사드에게 따지려고 멕라렌의 차고로 달려갔다. 슈마허는 쿨사드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호소하며 쿨사드에게 주먹을 날렸고 멕라렌 기계공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은 텔레비전을 통해 몇 백만 명의 관중들에게 보여졌다.
1999년, 페라리는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영국 GP에서의 충돌사고로 인해 부러진 다리와 98일 동안의 부제로 6번의 그랑프리를 참가하지 못한 슈마허의 시즌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슈마허는 그의 팀 메이트인 에디 얼바인이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도록 넘버 투 드라이버로 활약하는 등 최선을 다해 도왔지만 하키넨은 너무나도 강했고 그 해 마지막 레이스인 일본 GP에서 그의 두 번째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했다.
2000년도는 필적할 수 없는 페라리와 슈마허의 장악시즌이었다.
2000년 시즌, 미카 하키넨은 다시 한번 강적수로 돌아왔지만 일본에서 열리는 끝에서 두 번째 레이스에서 타이틀을 다시 획득하기 위한다면 슈마허를 먼저 이겨야 했다. 폴 포지션으로 선두를 지켰던 슈마허는 경주 초반에 하키넨에게 선두를 빼앗겼다. 하지만 두 번째 피트 스탑 후, 슈마허는 하키넨을 앞질렀고 챔피언십을 우승했다. 그의 세 번째 챔피언 타이틀은 슈마허를 그의 영웅인 아일턴 세나와 재키 스튜어트, 잭 브라밤, 니키 라우다와 넬슨 피켓과 동급으로 만들었지만 알랭 프로스트보다 하나 부족했고 판지오보다 2개가 더 부족했다.
2001년, 슈마허는 4개의 레이스를 남겨놓고 벨기에 GP를 포함한 9개의 레이스에서 우승하여 프로스트의 챔피언십 기록과 맞먹는 기록과 프로스트를 뛰어넘는 기록을 세웠다. (슈마허는 벨기에 2001에서 52번째 우승을 하였다).
2002년, 미하엘과 페라리는 기록을 다시 갈아치움으로 다른 경쟁 팀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했다. 슈마허는 11개의 레이스에서 우승했고 모든 레이스에서 포디엄에 올랐다. 그의 팀 메이트 루번스 바리첼로가 9번의 1위와 2위를 하여 페라리는 총 17개 레이스 중 15개의 레이스에서 우승 트로피를 획득했다. 그리고 미하엘의 5번째 챔피언십 타이틀은 그를 전설의 후안 마누엘 판지오와 동급에 올려놓았다.
2003년, 멕라렌과 윌리엄스의 강한 경쟁이 다시 돌아왔다. 시즌 초반 포인트 리더는 멕라렌의 키미 레이커넨이었지만 시즌 중반에 후안 파블로 몬토야가 레이커넨과 1점 차로 바짝 따라 붙었고 레이커넨은 슈마허와 1점 차로 뒤지고 있었다. 타이어에 대한 FIA의 변경된 규율은 윌리엄스와 멕라렌이 사용하는 미쉘린 때문에 영향을 받았지만 브리지스톤에서 공급받았던 페라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시즌 마지막 레이스인 일본 GP에서 레이커넨을 이기기 위해 1점이 더 필요했던 슈마허는 8위로 마무리하여 6번째 드라이버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하고 레이커넨보다 2점 더 앞선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2004년 , 슈마허의 눈부신 총명성과 페라리의 엔지니어링 스킬은 트랙 위에서 다시 펼쳐졌다. 시즌 중 후안 파블로 몬토야와의 충돌사고로 인해 완주하지 못한 모나코 GP를 제외한 13개의 레이스 중 12를 슈마허는 우승했다.
벨기에 GP에서 7번째 드라이버즈 타이틀을 획득했고 시즌 내 18번의 레이스 중 13번의 우승을 하여 2002년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었다.
모든 대단한 것에는 마지막이 있기 마련이다. 슈마허와 페라리에게 있어 2005년은 실망스러웠다. 팀들, 특히 브리지스톤을 사용하는 페라리 팀은 타이어 관련 규정이 바뀌어 어드벤티지를 따 낼 수 있는 균형을 잃었고 그 여파로 르노의 페르난도 알론소가 챔피언십을 이겼다. 그리고 슈마허는 알론소와 0.5포인트 차이로 3위에 그치고 말았다.
2005년 시즌은 미국에서 치러진 황당한 레이스로 유명하다. 포메이션 랩 후에 미쉘린 타이어가 아닌 브리지스톤 타이어를 쓰는 6개의 팀이 중도 탈락되어 FIA와 탈락된 팀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 (그 결과로 슈마허가 레이스를 우승했다). 그 논쟁은 더 큰 문제점을 생각지 않는 수치스러운 예였고 이로 인해 인내심으로 레이스를 기다리고 기대했던 많은 F1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미하엘 슈마허의 첫 F1 커리어 종지부는 2006년 시즌 말이었다. 알론소와 격렬한 타이틀 전쟁을 치렀던 슈마허는 2개의 레이스를 남겨둔 채 알론소와 동점이 되었지만 미하엘이 더 많은 우승을 획득했었기 때문에 스텐딩에서는 그가 첫 번째였다. 슈마허는 일본 그랑프리에서 16바퀴의 랩을 남기고 엔진고장으로 레이스 중 리타이어했다. 그리하여 알론소가 레이스를 우승했고 10점을 앞서 시즌 마지막 레이스가 열리는 브라질행 티켓을 따내었다. 슈마허는 알론소를 이기기 위해 질주했고 알론소는 마지막 레이스에서 득점을 하지 못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예선 경기에서 슈마허는 최고 속도를 기록하였지만 연료 압력 문제로 인해 세 번째 예선 경기에서 한 바퀴의 랩밖에 돌지 못했고 아쉽게도 레이스를 10번째 포지션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경기 초반에 슈마허는 6위까지 올라갔지만 알론소의 팀 메이트인 지안카를로 피지켈라를 추월하던 중 피지켈라의 프론트 윙으로 인해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슈마허는 피트로 돌아가는 걸 되풀이했고 결과적으로 19위까지 떨어지며 그의 팀 메이트와 레이스 리더였던 펠리페 마사와 70초나 뒤처지게 되었다. 하지만 슈마허는 다시 회복하여 피지켈라와 레이커넨을 추월하여 4위를 확보했다. 언론에서 그의 퍼포먼스를 "영웅적", "숨이 막힐 정도로 굉장했던 드라이브",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을 보여준 퍼포먼스" 라고 표현했다.
은퇴 후 미하엘은 전문인 고문의 자격으로 페라리와 함께 많은 F1레이스를 참관했고 페라리의 개발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었다.
2009년 슈마허의 F1복귀 설이 알려질 무렵, 페라리가 부상당한 마사를 슈마허로 교체하는 것이 더욱 더 가능해졌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연속적인 사건들을 통해 2010년 이 대단한 독일 드라이버가 독일의 유일무일 한 자동차 제조회사인 메르세데스를 위해 달리고 로스 브런과 함께 다시 협력 할 것이라 예측했다.
Afterabc는 미하엘 슈마허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F1레이싱 드라이버라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다시 한번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놀라움을 선사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슈마허가 뒤에서 밀어붙이고 레드불 레이싱의 비텔과 2위나 3위 쟁탈을 위해 치러질 몸싸움으로 미루어봤을 때 2010년은 알론소의 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F1 기록
시즌 | 팀 |
레이스 |
우승 |
폴 |
최고속도랩 |
포디엄 |
점수 |
포지션 |
1991 | 조던 |
1 |
0 |
0 |
0 |
0 |
0 |
- |
1991 | 베네통 |
5 |
0 |
0 |
0 |
0 |
4 |
14번째 |
1992 | 베네통 |
16 |
1 |
0 |
2 |
8 |
53 |
3번째 |
1993 | 베네통 |
16 |
1 |
0 |
5 |
9 |
52 |
4번째 |
1994 | 베네통 |
14 |
8 |
6 |
8 |
10 |
92 |
1번째 |
1995 | 베네통 |
17 |
9 |
4 |
8 |
10 |
92 |
1번째 |
1996 | 페라리 |
16 |
3 |
4 |
8 |
11 |
102 |
3번째 |
1997 | 페라리 |
17 |
5 |
3 |
3 |
8 |
59 |
탈락 |
1998 | 페라리 |
16 |
6 |
3 |
6 |
11 |
86 |
2번째 |
1999 | 페라리 |
10 |
2 |
3 |
5 |
6 |
44 |
5번째 |
2000 | 페라리 |
17 |
9 |
9 |
2 |
12 |
108 |
1번째 |
2001 | 페라리 |
17 |
9 |
11 |
3 |
14 |
123 |
1번째 |
2002 | 페라리 |
17 |
11 |
7 |
7 |
17 |
144 |
1번째 |
2003 | 페라리 |
16 |
6 |
5 |
5 |
9 |
93 |
1번째 |
2004 | 페라리 |
18 |
13 |
8 |
10 |
15 |
148 |
1번째 |
2005 | 페라리 |
18 |
1 |
1 |
3 |
5 |
62 |
3번째 |
2006 | 페라리 |
18 |
7 |
4 |
7 |
12 |
121 |
2번째 |
미하엘 슈마허는 아래와 같은 F1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06년의 첫 은퇴일자로)
챔피언십 타이틀 |
7 (1994, 1995, 2000, 2001, 2002, 2003, 2004) |
연속 타이틀 |
5 (2000-2004) |
레이스 승리 |
91 |
연속 우승 |
7 (2004, 유럽-헝가리) |
한 팀에서의 우승 |
72 (페라리) |
같은 GP에서의 우승 |
8 (프랑스) |
다른 GP에서의 우승 |
22 |
첫 번째와 마지막 우승의 최대기간 |
14 년, 1 개월2일 |
2위 |
43 |
연속 포디엄 마무리 |
19 (미국2001-일본2002) |
득점 마무리 |
190 |
연속 득점 마무리 |
24 (헝가리2001-말레이시아2003) |
리딩 랩 |
4741 (22,155 km) |
폴 포지션 |
68 |
프론트 로우 스타트 |
115 |
최고 속도 랩 |
76 |
더블 (폴과 우승) |
40 |
퍼팩트 점수(폴, 최고속도랩과 우승) |
22 |
챔피언십 포인트 |
1,369 |
시즌 내 최다 2위 포인트 |
121 (2006) |
시즌 내 최소 2위 포인트 |
7 (2006) |
몬차에서의 우승 |
5 |
시즌 내 우승 |
13 (72%) (2004) |
시즌 내 최고 속도 랩 |
10 (2004) |
시즌 내 얻은 점수 |
148 (최대82%) (2004) |
시즌 내 포디엄 피니쉬 |
17 (100%) (2002) |
최다 레이스를 남기고 우승한 챔피언십 |
6 (2002) |
연속 우승 년 수 |
15 (1992-2006) |
연속 챔피언 일 수 |
1813 (2000년 10월 8일부터 2005년 9월 25일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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